‘케테 콜비츠’ 의 예술 세계
-민중과 시대의 아픔을 형상화한 진실한 판화가 -
김 철 수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보고 로맹 롤랑이 말했다. “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판화가 거기에는 소박한 민중의 시련과 고통이 깃들여 있으며 이 여인은 어머니 같이 자애로운 팔로 민중을 끌어안고 진심을 그들과 고통을 함께 했으며 희생된 민중의 침묵에 형태를 부여했다.”라고.
그렇다. 케테 콜비츠는 인간 중심의 작품이다. 현존의 인간, 지배적인 인간을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작품은 성실함에서 비롯되는 위력을 지녔으며, 거기에는 예술과 삶이 결합된 인간 승리의 판화라고 할 수 있다.
케테 콜비츠의 예술이 감각적이라는 점에 대해 그동안 우리는 대부분 주목하지 못하였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사회비판적 내용이 무엇보다도 눈에 띄고 그 때문에 그 작품들의 감각적 매력과 감성이 가려져 버린다는데 부분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또 하나의 선입견 즉 도면 그림은 형이상학적 차원을 담기에 적합하고 감각적인 면에서 유화가 더 앞선다는 편견이 그것이다.
케테 콜비츠는 희색과 검은 색을 사용하는 화가였다. 그러함에도 딱딱한 선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고 광선에 의한 명암의 대비만으로 완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상을 묘사했다기 보다 직접 옮겨 놓은 듯 그 부피가 손에 잡히는 듯한 후기 작품 [자화상 -얼굴]이나 [죽음이 부른다] 같은 것을 보면 이 ‘흑-백-회화’가 비할 바 없이 풍부하고 투명하게 내면의 빛으로 비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목판화에서 조차도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효과를 내 훌륭한 판화를 완성시키고 있다. 케테 콜비츠는 반복하여 자신의 작품을 검토하였는데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작품이 반드시 지녀야만 하는 필연성을 고심하느라 그러하였다. 필연성을 요구하는 이런 감정은 그녀의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그녀의 작품 중에는 정물화 같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그녀의 관심사는 인간의 운명과 미래였다. 삶과 예술에서 언제나 권리를 박탈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 섰다.
자화상 Selbstbildnis 1934
Lithograph
케테 콜비츠는 원래 자유주의적 기질을 지닌 가문의 딸로 1867년 태어났다. 케테의 외할아버지는 신학자이며 탁월한 목사로서 교의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신앙 때문에 국가와 교회의 박해를 받았지만 자신의 신조를 굽히지 않고 자신의 일생을 자유 사상 운동에 바쳤다. 케테의 아버지 역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진솔한 사람으로 법관 생활을 청산하고 미장이의 삶을 택해 기능인이 되었다. 그 역시 자신의 신조를 더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었다. 이처럼 약간은 비범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케테는 자연스럽게 자유주의적 감성과 민중의 아픔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케테의 예술적 소질은 아주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신적인 것을 높이 사던 부모님의 적절하고 진지한 보살핌으로 열네 살부터 가장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그녀는 1885년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여행하던 도중 뮌헨에서 루벤스 작품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여자예술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노동자들과 친숙하게 지냈다. 갑갑하고 옹졸한 소시민의 생활에 비할 때 노동자 계급의 세계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뒤에 의사인 카를 콜비츠와 결혼하여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데 남편인 카를은 베를린 달동네에 병원을 차리고 가난한 노동자들과 삶을 같이 했다.
케테 콜비츠의 삶은 노동자의 그것과 차츰 일체감을 부릴 수 있었다. 그것의 제 1차적인 성과가 [직조공봉기](1893-97)라는 연작판화였다. 콜비츠의 출세작으로 꼽히는 이 판화는 1893년 초연된 게르하르트 하우프만의 [직조공들]이라는 연극에서 비롯된 것으로 클비츠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고 이 충격은 곧 작품으로 연결된다. [직조공 봉기]는 초기의 산업화 시대에 자본가와 수공업자들간의 갈등을 기본 축으로 삼고 있다. 모두 6편의 연작으로 꾸며진 이 작품은 궁핍으로부터 죽음. 모의. 행렬. 돌격. 종말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데 석판과 동판의 부식 기법을 사용하여 4년이나 걸린 이 연작은 당대의 시대 미감을 응축시킨 걸작이다. 이 연작은 끝내 드레스텐에서 독일 최고상을 수상하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굳건히 다지게 된다. 이 작품은 조형예술분야에서 계급투쟁을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개척자적인 작품이다. 그녀는 ‘나의 성공은 뜻밖이었다’고 훗날 ‘회상’에 이때를 기록했지만 이 작품이 그토록 감동을 주는 것은 시민사회의 교양 계층을 넘어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판화 연작 <직조공의 봉기 Weberaufstand>
#1 빈곤 Not 1893-1894
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2 죽음 Tod 1897
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3 회의 Beratung 1898
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4 직조공의 행진 Weberzug 1897
Etching and
sandpaper aquatint
#5 소요 Sturm 1897
Etching and mezzotint on
wove paper
#6 결말 Ende 1897
Etching, aquatint, and
sandpaper ground on wove paper
그녀는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고통스런 변신의 과정을 겪었다. 전쟁에 참여하였던 아들의 죽음은 그녀의 삶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아들 페터가 죽은 후 그녀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 작업해야 하는지 잊지 않았으며, 저 유명한 목판화 시리즈 〈전쟁〉 연작을 탄생시킨다. 그녀는 숱한 반전평화운동의 작품을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전쟁은 이제 그만]이다. 나치에 의한 제2차 세계 대전의 광란을 묵과할 수 없어 수난의 길을 택한다. 콜비츠는 시대의 고통을 증거하는 내용의 작품을 줄기차게 제작했다. 전쟁의 체험은 전통적인 사실주의적 표현수단으로 포착될 수 없었고 이때문에 그녀는 과거에 사용되었던 사실주의적 형식을 버리고서 새로운 재료 기법으로서 목판을 사용했다. 그 당시에 표현주의 화가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이 겪는 회의와 갈등을 걸러내고 소화해 냈다.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헤매지 않고 그 곧고 험한 길을 걸어갔다. 케테 콜비츠는 예술 그 자체를 위해 생산되는 모든 예술에 반대하였다. 그녀의 삶과 작품은 아주 다양한 해석을 불러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었던 적이 한번도 없다. 그녀의 작품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전통과 특정한 사회적 출신을 지닌 인간으로서 겪었던 것들을 형상화했다는 의미에서 자전적이다. 그녀는 초기에 주로 노동자들에게 느낀 매력들을 형상화하였으나 후기에는 자신의 운명과 실존에서 그 시대의 일반적 사람들의 운명을 실존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빈곤의 묘사든 죽음과의 대화든 그녀가 의도했던 것은 어떤 필연성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임의적인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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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희생 Das Opfer 1922-1923
Woodcut on heavy cream wove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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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원병들 Die Freiwilligen 1922
Wood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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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부모(3rd version) Die Eltern(III Fassung) 1923
Woodcut on cream wove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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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과부Ⅰ Die WitweⅠ 1922
Wood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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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과부Ⅱ Die WitweⅡ 1922-1923
Wood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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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어머니들 Die Mutter 1923
Wood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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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민중 Das Volk 1922-1923
Woodcut
콜비츠의 [직조공 봉기]의 출세작에 이어 널리 알려진 판화 연작은 [농민전쟁](1904-1908)이다. 일곱 장의 이 동판화는 근대 독일의 형성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16세기 초의 농민 전쟁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노동의 땀방울로 가득찬 [밭가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농민의 삶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콜비츠의 예술 세계의 기저에는 계급 투쟁적 요소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만 작가 자신의 고백처럼 ‘대중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말을 상기할 때 그녀는 대중과의 의사소통을 중시했고, 콜비츠 예술이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과도 상통한다. 따지고 보면 판화같은 매력적 장르도 드문데 무엇보다도 판화는 미술의 귀족적 성향을 제거해 준다는 점이다. 민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복제예술’이라는 점과 재료도 싸고 다루기 쉬우며 이미지의 강렬한 부각 때문에 대중적인 호소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케테 콜비츠의 예술정신이 이런 매체적인 요소와 맞아 떨어져 더욱 그 가치가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의 힘에 시대의 힘이 가세된 본능에 이끌려 이 시대에 대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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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밭 가는 사람 Die Pfluger 1906
Etching and aquat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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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능욕 Vergewaltigt 1907
Etching, softground, and aquat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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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날을 세우며 Beim Dengeln 1905
Et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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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지붕 밑에서의 무장 Bewaffnung in einem Gewolbe 1906
Etching with tonal textures and engra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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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봉기 Losbruch 1903
Etching and soft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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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전쟁터 Schlachtfeld 1907
Etching, softground, and aquat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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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잡힌 사람들 Die Gefangenen 1908
Etching, softground, and aquatint
이후 〈프롤레타리아트〉 연작부터 노년에 이르러 완성한〈죽음〉연작까지, 그녀의 예술에서 현실참여의 정신은 일관되게 지속되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무엇인가 박탈당하고 억울한 사람들, 전쟁과 가난 같은 사회적인 문제로부터 평등세상을 염원하는 이상세계까지, 그녀의 조형적 발언의 폭과 깊이는 단연 독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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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있는 남자의 누드 Sitzender mannlicher Akt 1891
Et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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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벽에서 An der Kirchenmauer 1893
Et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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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여, 얼마나 피흘려야 하는가 Aus vielen wounden blutest du, O volk 1896
Etching and aquatint in sepia inks on wove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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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 옆의 여자 Frau an der Wiege 1897
Et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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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사람들 Zertretene 1900
Et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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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Frau mit totem Kind 1903
Engraving and softground etching
retouched with black chalk, graphite, and metallic gold paint
on heavy wove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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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여인, 그리고 아이 Tod, Frau und Kind 1910
Etching and softground on heavy cream wove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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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을 향한 여성노동자 Arbeiter Frau im Profil nach links 1903
Lithograph on Japa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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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Das Warten 1914
Litho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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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Aufruhr 1899
Etching, engraving, aquatint and roul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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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뇰 Die Carmagnole 1901
Etching, aquatint, engraving and sandpaper
콜비츠의 작품세계는 노동자 빈민층의 현실묘사라든가 혁명이나 전쟁과 같은 소재가 많지만 의외로 전기적 요소가 많이 보인다. 그녀는 100여점이 넘는 자화상을 제작했는데 자기 자신을 묘사하려는 충동을 일종의 자기연민이라고 규정해 버리기는 어렵다. 그녀의 자화상은 오히려 어떤 인생 그리고 또한 어떤 시대에 대한 답변이자 증언이며 검증이요 시금석에 더 가깝다.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들은 숭고하고 초시간적이며 비개인적이어서 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비밀들의 잡동사니 더미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다. 바로 고릴라 같은 동물적 면모를 자신의 얼굴 모습에 부각시켰는데 콜비츠의 얼굴은 응축되어 일종의 탈같은 모습이며 가공되지 않은 본질을 포착하여 그 특성을 새겨 넣은 탈로써 인생의 중압이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분절시키지 않은 채 슬픔과 고통과 멜랑콜리의 면모를 드러내며 고요히 실려 있다.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에서 마주하는 실제의 그녀가 기록한 일기 구절은 이러하다. 「힘. 인생을 그대로 파악하고 살아가면서 꺾이지 않아 비탄도 눈물도 없이 강인하게 자신의 일을 꾸러 가는 힘. 자신을 부정하지 말며, 자신의 인간성을 더욱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 그것을 개선해 나갈 것. 기독교적 의미도 아니고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개선 말이다. 요행심, 사악함, 어리석음을 퇴치하고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 내부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강화하라. 본질적인 인간이 될 것.(일기 1917년 2월)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0세기 전반의 격동기를 뜨겁게 살다가 간 독일의 여류 화가. 판화의 세계를 독보적 위치로 끌어올린 판화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선구자. 미술의 기능과 역할을 사회 속으로 끌어들인 작가.... 케테 콜비츠에게 부여해 주는 찬사들이다. 그의 삶은 곧 투쟁의 현장이고 아름다움의 동의어로서 히틀러 만행에 반기를 들면서도 미술가로서 시대를 증언한 화가로서, 판화가로서 항상 고난 받은 인간의 편이 되어 민중 미술가로 일생을 살다 간 케테 콜비츠. 이것이 우리가 길이 그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ㅁㅁ 유쾌한 만남 ㅁㅁ > ㅁㅁ -- 작품 감상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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