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여행지
#용궐산
#휴드림
#적성강
#하늘길
#종호팔경
휴드림앞산이 무량산
뒷산이 벌동산
옆에보이는 산이 용궐산이다.
.
집앞에 흐르는 강이 섬진강인데 특히 집앞의강은 적성강이라고도 한다.
결혼하고 처음 이곳에 왔을때는 적성강이라는 말만 들어서 나는 섬진강인줄도 몰랐다.
그래서 섬진강을 간다고 다른곳을 헤맨적도 있고 시인 김용택 마을앞 진메마을앞에 흐르는 섬진강이 우리집으로 흐르는 줄도 모르고 그곳을 멋지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더랬다.
어쨌든 이제 나는 이 섬진강변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이곳 사랑에 푹 빠졌다.
이곳을 며칠간 떠나려면 떠나기도 전부터 이곳이 그리워져서 슬퍼지기도 한다.
이 마음을 표현한 것은 이공간이 처음이다.
그 정도로 이곳은 나의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용궐산에 하늘길이 생기면서 부터 유명세를 타기시작 했다.
집에서 가깝게 보이는 용궐산에 요상스런 철다리같은 것이 생겨 궁금했는데 바로 그것이 잔도. 이름은 하늘길이다.
지난 겨울무렵부터 만들기 시작했었는데 봄철이 되자 거의 다 완성된것 같아서 직접 오르기로 했고 그렇게 올라간 하늘길.
세상에나 휴드림이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는게 아닌가.
물론 나는 우리집이라서 더더욱 잘 보였을 것이다.
특히 휘돌아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가 환상적이었다.
그때는 이른 봄이라서 황토색 땅이 보기 싫었었다.
어제 친구가 용궐산에 올랐다면서 우리집이 정말 멋지다며 사진찍어 보내주었다.
이른봄과 다르게 푸른 초원처럼 보이는 콩밭.
최근에 강변에 축대를 쌓느라고 강바닥이 좀 파헤쳐져서 좀 그렇긴 하지만 앞으로 또 갈대랑이 우거질테니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는 바로 강에 흩어져 있는 한무리의 바위들인데 그곳이 유서깊은 곳이다.
그냥바라보면 바위군락에 불과하다.
마침 몇주전에 열린 순창에 특집기사가 실려 함께 링크한다.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여흥을 즐긴 기록들도 함께 남아 있다.
집앞 강변을 바라보며
저것을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본다.
마침 열린순창에 그 바위들에 얽힌 기사가 몇주전 실려있기에 스크랩한다. 이곳이 좀더 특별해질것이다
(열린순창 기사)
순창, 숨겨진 이야기(4) 동계 아홉 암각서와 종호 팔경
림재호 편집위원 승인 2021.08.25 17: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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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호 주변 돌섬과 암각서
▲동계 섬진강 주변 전체 지도(어은정∼요강바위)
순창군민들은 순창지역 섬진강 구간을 적성강(赤城江)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취암산 동쪽, 무량산 아래를 흐르는 적성강 지역을 특별히 만수탄(萬水灘)이라 했다. 이 일대는 섬진강 물줄기가 호남정맥을 넘나들며 빚어낸 기암괴석으로 섬진강 구간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이다. 무량산 너머로 벌동산(옛 취암산ㆍ587m)과 마주하며 북으로 용궐산(647.6m), 동으로 무량산(587.0m)이 에워싼 곳에 투구 모양의 돌섬들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일대 소(沼)를 ‘종호(鍾湖)’라 한다.
초로 양운거
종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향유하고 풍류를 누린 대표적 인물이 초로(楚老) 양운거(楊雲擧ㆍ1613∼1672)였다. 그는 남원양씨 구미리 입향조인 양사보(楊思輔)의 9대손으로 조선시대 효종 때 사람이다. 산수를 사랑해 구미리 만수탄에서 지북까지 총 9개의 정자를 세운 부호였다. 종호정(鍾湖亭)이라고도 불리는 육로정(六老亭)을 짓고 시주(詩酒)를 즐겼다.
‘종호’ 바위글씨와 취암산(현재 벌동산) 자락에 ‘석문’ 바위글씨를 새겼으며, ‘종호바위 위에 술을 부어 놓고 마신 거사’로 알려져 있다. 국가에서 큰 부자에게 주는 칭호인 참봉(參奉) 칭호를 들었던 인물로 《현종실록》에 흉년이 들자 쌀 수백 석을 내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와 함께 노닐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남원 사람들인 양진당(養眞堂) 하만리(河萬里), 최휘지(崔徽之)와 최유지(崔攸之) 형제, 유동연(柳東淵)과 유동달(柳東達) 형제였다. 이들을 여섯 명의 노선(老仙), 즉 육로(六老)라 불렀다.
〈종호팔경운〉
양운거가 지었다는 9개의 정자는 소멸되었지만 〈종호팔경운〉(鍾湖八景韻ㆍ종호팔경 시 운자를 따서 짓다)이라는 시가 있어 옛 만수탄 종호의 경관과 풍류객들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 〈종호팔경운〉은 9편의 칠언절구로서 종호의 목가적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육로(六老) 일원이었던 하만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그 후손들이 1911년에 간행한 시문집 《양진당유고》(養眞堂遺稿)에 실려 있다.
제1경 호수 안의 돌섬(湖中石嶼)
땅은 종호(鍾湖)를 숨겨두고 주인을 기다리는데/ 하늘이 돌섬을 만들어 놓으니 낚싯줄 드리우기 좋네./ 그대는 육로암에 새겨진 글자를 보았는가?/ 물이 넘실거려 모래로 갈아도 물에 갈리지 않네.
제1경은 강물 한가운데 배치된 풍류의 공간인 돌섬(石嶼ㆍ석서)들을 노래하고 있다. ‘종호암’(鍾湖巖)과 ‘육로암’(六老巖), ‘조대’(釣臺)라 새겨진 바위들이 펼쳐진다.
제2경 바위 위 웅덩이 술통(巖上窪樽)
하늘이 기이한 바위를 쪼아 술통을 만들었으니/ 병 같기도 하고 사발 같기도 하고 또 동이 같기도 하네./ 다만 아홉 웅덩이로 하여금 길이 마르지 않게 한다면/ 남들 비록 다음 산으로 갈지라도 나는 홀로 남아 있겠네.
바위 위 ‘술을 담는 독’, 바위 모서리에 구준암(九樽巖)이란 글씨가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이는 ‘아홉 개의 술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바위에 형성된 다수의 돌개구멍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개의 구덩이 중 하나는 마식작용(물ㆍ바람 등에 운반된 자갈이나 모래가 바위를 깎아 냄)에 의해 폭 20cm, 깊이 60cm 정도로 푹 파인 게 자연 술통이라 할 만하다.
양운거는 이 바위 위에서 벗들과 술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술 주전자가 너무 작아 거듭 술을 채워야 하는 것이 번거로워 바위 웅덩이에 술을 가득 채우고, 술로 목을 축여가며 시를 주고받으며 읊었다고 한다.
제3경 영취봉의 돌아가는 구름(靈驚歸雲)
집 뒤에는 취봉이 우뚝 솟아 있고/ 하늘가를 돌아보니 푸른 연꽃이 피었네./ 구름이 와서 장맛비 된다한들 상관 않는/ 무심한 듯 태연한 네 모습을 사랑하노라.
제3경은 ‘영험한 취암산을 돌아오는 구름’을 노래하고 있다. 취암산은 종호암 전면에 펼쳐진 산으로 만수탄을 중심으로 동서로 무량산과 대응하고 있다. 현재 명칭은 벌동산이다.
제4경 향로봉의 아침 해(香爐朝日)
동쪽 봉우리에 아침 햇살이 구름 사이를 통과하니/ 따뜻한 기운이 왕성해 큰 산과 같네./ 주인은 술에 취해 아침잠을 편히 자고/ 늦게 일어나 아이 불러 낚싯대를 드리우네.
제5경 석문의 낙엽(石門落葉)
산길 험한 곳에 돌로 문을 만들었고/ 늙은 회화나무는 구불구불 몇 년 된 뿌리인가?/ 가을바람에 잎이 떨어져 다니는 자취를 덮으니/ 물의 근원을 다시 찾을 적에 헤맬까 미리 염려하네.
가을철 석문 주변에 펼쳐진 단풍 경치를 보는 감회를 밝히고 있다. 석문은 종호암에서 북서쪽으로 1.6km 되는 곳에 있다. 이곳에서 상류 쪽 약 350m 지점에 명물 요강바위가 있다.
제6경 갓끈 씻는 여울에 졸고 있는 오리(濯灘睡鴨)
넘실대는 푸른 물결 바닥까지 맑고/ 강에 임하여 바로 적합한 곳이면 내 갓끈을 씻으리./ 아이에게 크게 노래하지 말라고 말을 전하는 것은/ 물가 모래톱에서 오리 놀랄까 두렵기 때문일세.
양운거가 세웠다는 정자 중 하나인 탁영정, 그 주변 ‘탁영탄(濯纓灘)’으로 판단되는 여울의 풍광과 그곳에 평화롭게 노니는 오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구간에는 양운거의 선조인 양배(楊培)와 양돈(楊墩) 종형제가 낚시하던 바위 ‘배암’과 ‘돈암’, 즉 ‘형제암(兄弟岩)’이라고 불리는 2개의 큰 바위가 마주보고 있다.
돈암 상류 약 120m 서안(西岸) 석벽에는 ‘산인동(散人洞)’이란 바위글씨가 완연하다. ‘세상일을 잊고 한가로이 자연을 즐기며 지내는 사람이 사는 곳’이란 의미다.
제7경 앞들의 목동 피리소리(前郊牧笛)
비 온 뒤 강물 흐르는 교외에는 작은 풀이 푸르고/ 목동의 피리는 새로운 소리를 연주하네./ 말등이 소등의 편안함만 못하니/ 은거하는 선인이 도를 깨달으면 이러한 한가한 심정이라.
제8경 옛 절의 새벽 종소리(古寺晨鐘)
절은 아득히 푸른 하늘에 가깝고/ 만 길 낭떠러지라 길이 통하지 못하네./ 늙은 스님 참선에 들었으니 누가 보리오./ 맑은 새벽에 오직 예불 종소리만 들리누나.
제8경은 옛 절에서 들리는 새벽 종소리를 노래하고 있다. 만수탄 인근에 있었던 취암사 또는 불암사의 타종 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암각서
만수탄 종호 일원에서 확인되는 바위글씨는 총 9점이다. 첫 번째 종호 바위글씨는 구미리에서 육로정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병풍처럼 서있는 석벽(石壁)에 있다.
‘鍾湖’라는 대형 바위글씨 이외에 ‘종호화수계(鐘湖花樹稧)’라 적고 총 10명의 남원양씨 회원명이 나열되어 있다. 한편에는 “국판노미 처양복례 종부익사처(국판노미의 아내 양복례가 남편을 따라 빠 져죽은 곳)”이라 새겨져 있다. 종호 바위글씨 두 번째는 현재 육로정(六老亭)이라는 편액을 단 종호암에 종호1 글씨와 거의 같은 크기로 횡서되어 있다.
네 번째는 돌섬에서 약 100m 상류에 형성된 응회암에 종서로 새겨진 구준암(九樽巖ㆍ9개의 술통)이란 글씨다. 다섯 번째 ‘조대(釣臺ㆍ낚시질하는 곳)’라고 쓴 글씨다. 여섯 번째는 ‘육로암(六老巖)’이고, 일곱 번째는 ‘금암(琴巖)’라는 글씨다. 탄금(거문고와 가야금) 풍류가 행해졌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여덟 번째 종호암에서 직선거리로 1.6㎞, 북서쪽 적성 석산리 방향으로 내려오면 자연석에 ‘石門’이란 바위글씨가 새겨 있다. 아홉 번째 종호팔경 제6경 강 건너 바위 위에 ‘산인동(散人洞)’이란 바위글씨가 종서와 횡서로 중복해 새겨져 있다.
이중 ‘종호’ 바위글씨는 ‘鍾湖’ 또는 ‘鐘湖’라는 다른 한자로 새긴 것을 볼 수 있는데, 후자(鐘)는 종을 뜻하는 반면에 전자(鍾)는 손잡이 없는 금속제 술잔을 의미한다. ‘종호’라는 지명의 유래는 “시객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종소리처럼 메아리친다.”라는 의미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육로 모임에서 풍류를 주도했던 양운거가 돌섬 밖에서 시주(詩酒)에 필요한 물품을 수급하기 위한 신호수단으로 종(鐘)을 이용했던 연유로 ‘종호’라 불리었다는 견해도 있다(전북대 김화옥 교수).
※남원양씨 세적집요 《버들숲 짙푸른 양문을 다시 열며》와 논문〈바위글씨와 팔경으로 추적한 만수탄(萬水灘) 종호(鍾湖)의 경관 향유자와 풍류상〉(김화옥ㆍ박율진ㆍ노재현ㆍ김홍균 공저)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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